송계산방/백인현미술관

송계산방 - 백인현 미술관/그룹전. 기타

공주에 정착한 "나비화가" 우석(愚石) 김기창(金基昌) : 송계산방 백인현

송계, 송계산방, 송계산방주인 2022. 11. 16. 00:04

<첨부파일>에서 - 연구내용을 보기 바랍니다.

(아카이브 자료) 공주에 정착한 나비화가 우석(愚石) 김기창(金基昌).hwp
3.31MB
우석(愚石) 김기창(金基昌) - 작가 자료.zip
6.43MB

 

 

공주에 정착한 “나비화가” 우석(愚石) 김기창(金基昌)

 

우석 김기창(愚石 金基昌, 1892~1976) 선생은 그리 널리 알려진 화가는 아니지만, 친근한 나비를 소재로 일제 강점기부터 《조선미술전람회전》에서 활동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비화가’이다. 우석 김기창은 서울 효자동에서 태어나 공주시 정안면 장원리에 정착하여 산수화, 풍속화 등의 작품도 남긴 근현대 작가이다.

선생은 흔히 시골에서 볼 수 있는 나비를 소재로, 특히 바위 주변에서 노니는 나비들을 화훼와 더불어 감성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그린 정교한 화풍을 유지하여 “김나비”라 불리고 있다.

 

우석의 나비그림(胡蝶圖)을 접하면 어린 시절 추억을 안겨주던 <나비> 동요가 먼저 정겹게 다가온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봄바람에 꽃잎도 방긋방긋 웃으며

참새도 짹짹짹 노래하며 춤춘다

 

선생의 그림은 우리가 국민학교 때 방학이면 숙제로 곤충채집을 했던 나비에 대한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한다. 나비가 하늘을 날며 춤추다 꽃 섶에 앉으면 가는 손가락 모아 잡아보곤 했다.

 

우석 선생에 대한 글은 선행 자료를 바탕으로 후손인 손녀 김효성과 제자인 청석 이재창의 채록과 답사를 중심으로 (1) 서울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일제 강점기의 전반기, (2) 해방 직후에 공주로 이주하여 정착한 1950년 이후의 작품 활동 및 제자 양성 시기를 후반기로 나누어 정리한다.

후손으로 1세대인 자녀는 이미 작고했고, 2세대인 손녀 김효성은 우석 선생이 정안에 정착한 후인 1954년에 출생하여 할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웠고, 성장기를 할아버지와 함께했기 때문에 우석 선생에 대한 많은 내용을 체득하여 증언하고 있다.

우석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풍에 수전증을 앓고 있었음에도 작품 제작을 하였으며, 그의 제자로는 청석 이재창(靑石 李在昌, 1938~ )이 천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1, 서울 생활 성장시기 - 전반기

 

우석 김기창 선생은 1892년에 서울 효자동 78번지에서 태어났다. (출생 년도를 1897년으로 기술한 것도 있으나, 후손인 손자가 종로구청에서 제적 등본으로 확인한 결과 1892년이다.)

조선 말기에 고위직의 무관과 문관으로 명문가 집안의 4형제 중 막내인 우석은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성장하며 그림을 좋아하여 취미생활로 나비그림을 공부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일호 남계우(一濠 南啓宇, 1811~1888)가 조선시대 나비그림의 일인자로 “남나비”라 불렀고, 백은배(白殷倍, 1820~?), 김석희(金奭熙), 송수면(宋修勉, 1847~1916), 서병건(徐丙建, 1850~?), 정진철(石下 鄭鎭澈, 1908~1967) 등이 있었지만, 우석이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고 누구와 교우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다만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혼자서 나비를 관찰하여 그린 것으로 보인다.

 

우석이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전》에 출품한 “투접(鬪蝶)” <도판 1>은 우석의 나이 30세에 꽃을 향하여 다투어 날아가는 나비들의 간절한 마음을 그린 작품으로, 흑백 도록이지만 서울에서 활동한 전반기의 나비그림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따라서 30세를 즈음하여 화가로서의 길에 접어든 것으로 여겨진다.

 

(도판 1) 김기창, (투접(鬪蝶)),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전

 

조선미술전람회전 제1회 공모전에는 故 안중식(安中植, 1861~1919), 고희동(高羲東), 허백련(許百鍊), 김은호(金殷鎬), 이용우(李用雨), 김용진(金容鎭) 등의 걸출한 작가들이 출품한 것으로 보아 우석 김기창 선생도 30세를 즈음하여 이미 작가로서의 길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며, 이들과 교우하고 활동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미술전람회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창설한 관전으로 1922년부터 1944년 해방 전까지 23회를 거듭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는 조선총독부가 문치 정책의 하나로 진행하였으나 당시 상황으로는 미술가를 배출, 성장하게 하는 등 작가 활동의 기반 조성에 기여하였다.

서울에서 생활한 전반기는 우석의 성장기로 그림을 독학으로 시작하였다 하고, 집안 조카 학렬인 이당 김은호(1982~1979)와 교우하며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전》에 함께 출품하여 이미 작가로서의 기반을 구축한 것으로 보이나, 공주에 정착하기 전까지 서울에서의 활동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어 안타깝다.

 

우석의 20대 후반기 효자동에 살 때 그림에 관한 일화가 있다.

“하루는 우석이 골목에서 말못하는 어린 아이가 흙바닥에 나무막대기로 그림을 그리고 있기에 다가가 살펴보니 황소를 그렸는데, 황소를 너무나 잘 그려서 우석이 칭찬하며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툇마루에서 그림을 지도하고, 나중에 이당에게 소개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 아이가 연하의 같은 이름인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이었다고 한다.

 

우석 선생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부인은 해풍 김씨(1900~1997)로,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아들 김대호(1927~1977)는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공주의 정안, 의당, 천안의 목천, 성환 등지의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77년 갑자기 위암으로 병사하였으며, 딸은 결혼 후에도 2013년까지 공주시 정안면 장원리 구억말에서 생활하다 작고할 만큼 공주와 인연이 깊다.

아들 김대호는 3녀 3남의 자녀를 두었으며, 자녀들은 모두 아버지와 함께 공주 정안에서 생활하며 근처의 석송국민학교를 다니며 성장하였다. 장녀의 경우 공주에 정착한 후인 1951년에 출생하여 공주대학교 부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2. 공주 정착 작품활동 및 제자 양성시기 - 후반기

우석 김기창 선생은 해방 직후 1950년 경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3째 형의 권유로 공주시 정안면 장원리 329-3번지 구억말(마을)에 형을 따라와 정착하며 공주 생활을 시작했다.

우석의 형은 서울에서 재력이 있었으나 나이가 들어 서울 생활을 떠나 산 좋고 물 좋은 시골 자연에서 살고자 팔도를 돌며 물색하던 중 정착한 곳이 풍광 좋은 공주 정안의 장원리 구억말이다. 이곳에 형이 커다란 한옥의 기와집을 짓자 후에 이주하였다. 정안은 옛날에 호남으로 통하는 큰길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정착한 구억말은 뒤쪽으로는 나지막한 산이 대나무와 더불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앞으로는 정안천이 마을을 휘어 감고 있으며, 동네는 작은 도랑이 구비구비 돌며 경주의 포석정처럼 흐르고 있는 수로 시설이 있었다. 저택은 이를 끌어들여 물길을 다듬고 많은 꽃을 심어 정원에는 항상 나비가 춤추고 있었다 한다.

 

1950년 이후로 우석 김기창 선생과 아들 김대호, 그리고 손주 등 3대가 이러한 아름다운 공주 정안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우석은 정착한 구억말에서 서울보다 자유롭고 더욱 자연스럽게 나비와 소통하며 작품 생활을 펼쳤고, 청석 이재창을 제자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재창은 19살이던 1957년에 우석을 7번이나 찾아가 그림을 배우고자 간청하였으나, 우석은 대쪽같은 성품에 번번이 거절하여, 결국 8번 만에 승낙을 받고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후 이재창은 우석의 집에서 기숙하기도 하고, 우석과 한 방에서 동침하기도 하면서 나비그림을 그렸다. 우석은 제자를 아꼈고, 함께 생활한 손주들은 늘 보는 이재창을 ‘그림 아저씨’라 부르기도 했다.

한 번은 우석이 손녀인 김효성이가 그림을 좋아하고 나비그림에 관심이 많아서 제자로 삼으려고 국민학교 6학년 때 몇 달 지도를 하였으나, 손녀는 어린 나이에 놀지도 못하고 할아버지 방에서 꼼짝 못 하고 그림만 그려야 하는 답답함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우석은 평소 성품이 선비처럼 점잖고 대쪽같이 강직하여 평생 동안 작품발표를 거의 하지 않았고 그림 그리기만 좋아했다.

구억말에서 우석은 나비그림 외에도 산수화와 풍속화 그림도 그렸으나 아쉽게도 전해지는 작품이 많지 않다. 도판으로 볼 수 있는 나비그림 2점, 그리고 제자를 지도하는 과정에서 이재창이 그린 풍속화 연습작품에, 우석이 배경의 돌과 언덕, 나무를 시범적으로 그린 풍속화 4점이 있다. 이 풍속화는 이재창의연습작품으로 미완성이지만, 이재창이 은사님을 사모하며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이것이 공주 정착기 이후 확인되는 유작의 일부이다.

가족 사진 <도판 2>는 1975년에 충남 온양 온천의 이충무공기념각에서 찍은 것으로, 3대가 함께한 것으로 한복차림이 우석 김기창 선생이다.

(도판 2) 충남 온양 온천에서 찍은 가족사진, 1975년

 

나비그림 <도판 3>은 우석의 나이 64세이던 1956년 丙申年에, 같은 동네 장원리의 경산 최병기(敬山 崔炳琦, 1896~?)에게 회갑을 맞아 선물한 작품이다. 화제는 “石壽松年”으로 금석과 같이 장수하고 송백과 같은 연년을 평안하게 보내라는 내용이다.

경산 최병기는 명문가 議官인 崔麟植의 장남으로 1896년 정안 장원리에서 출생하여, 공주 향교의 전교를 지냈으며 유작으로 경산일기(敬山日記)가 있다.

 

(도판 3) 김기창, (石壽松年), 1956년, 崔炳琦 회갑기념 작품

 

 

나비그림 <도판 4>는 손녀 김효성이 소장한 “나비그림(胡蝶道)”이며. 우석 김기창의 나비그림을 가장 선명하게 감상하고 실제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걸작품이다. 정확한 관찰과 사실적인 묘사로 다양한 모양의 나비들이 꽃을 찾아 날아들며 바위 주변에서 화훼와 포치하고 있으며, 곱고 화려한 설채와 정교한 공필법을 보이는 우석 말년의 작품이다. 낙관에 “戊申之秋十月七七歲 愚石 金基昌” 이라 적고 있어, 1968년 戊申年 가을인 10월에 우석의 나이 77세에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도판 4) 김기창, (나비그림(胡蝶道)), 1968년, 손녀 김효성 소장

 

 

채록을 통해 새롭게 발견하고 실견한 풍속화 작품 4점 <도판 5>는 각각 40.0cm×28.5cm로 청석 이재창이 그린 습작이다. 이 그림의 밑그림 채본은 우석 선생이 풍속화 지도를 위하여 평소에 그려놓은 조선시대 말기의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작품을 임모한 채본으로 여겨진다. 그 채본 위에 비단을 올려놓고 제자인 이재창이 먹으로 선묘를 하며 설채한 연습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돌과 언덕, 나무는 우석 선생이 지도하며 제자에게 시범을 보인 것으로, 우석 말년의 산수화 양식의 일부를 보여준다. 우석은 말년에 수전증으로 정교함보다는 다소 거친 표현의 필법을 보인다.

 

(도판 5) 제자인 청석 이재창의 연습작품 – 우석이 배경 산수를 지도.

             <풍속인물화>, 40.0cm×28.5cm, 비단에 채색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성장한 손녀의 증언에 의하면 우석 선생은 평소에 다양한 나비를 채집하여, 관찰하며 정교하게 나비그림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산수화, 풍속화, 동양 자수에도 관심이 많아 주변 동네 처녀들에게 자신의 나비그림을 동양 자수로 수놓도록 지도하곤 하였다고 한다. 손녀인 김효성도 학창 시절에 할아버지의 나비그림을 바탕으로 동양 자수를 수놓았다고 한다.

한편 우석의 아들 김대호도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교편생활 중 공주 의당국민학교에 근무할 때, 페스탈로치에 관한 그림을 유화로 그려 학교 본관 복도에 게시한 바가 있는데 주위의 찬사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우석은 성품이 선비같이 강직하였지만, 손녀의 석송국민학교 학예발표회 행사 때는 담임 선생님께서 여러 번 간청하여 손녀의 걸개 풍속화 배경 그림을 그려 주었고, 큰 손녀가 결혼할 때에는 나비그림 8폭 병풍을 축하 선물로 그려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석은 장원리 구억말 기와집의 안채가 화재로 소실되는 등 후에 가세가 기울고, 아들 김병호의 직장이 천안으로 발령 나며 목천과 성환에서 생활하다 1976년에 타계하였다. 이어서 아들마저 1년 뒤에 갑자기 병사하고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하며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작품 모두가 유실되고 말았다.

3. 청석 이재창을 통한 나비그림의 계승

제자인 청석 이재창(靑石 李在昌, 1938~ )은 19살이던 1957년에 인근 연기에서 7전 8기의 노력으로 우석을 찾아가 나비그림을 사사하기 시작하였다. 간헐적으로 또는 기숙으로 같이 생활하며 우석 선생과 한방에서 동침하기도 하면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우석은 책갈피에 끼워 놓은 나비채집을 통하여 제자에게 정확한 사실적인 관찰과 묘사, 정교한 공필법과 곱고 화려한 설채 등을 사사하였다. 청석은 나비그림 외에도 풍속인물화 등을 배웠으며, 靑石의 “石”자도 우석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렇게 사사한 나비그림을 바탕으로 이재창은 ‘나비 화백’으로 주목받았고, 1981년에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당시 정교한 필법의 나비 작품은 일반인보다, 생물학자의 관심이 더 클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1982년에는 대전시민회관 개인전, 2007년에는 천안 시민문화회관 고회 기념전, 2010년에는 천안 지산갤러리 개인전 등 6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기타의 초대전과 그룹전에도 나비그림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이재창은 이러한 30여 년의 발표를 통하여 오랜 기간 사사하며 전수한 우석 김기창 선생의 나비그림 전통을 밀도 있고 성실하게 계승하고 있다. 이재창은 大行이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으로 일종의 선종 회화와 풍속화 등도 그렸다.

요즈음 이재창은 80세가 넘는 고령으로 눈도 어둡고 청력도 많이 떨어져 작품 활동을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제자의 작품을 통하여 우석 김기창 선생의 나비그림(胡蝶圖)의 정교함과 하늘을 나는 자태를 볼 수 있다.

 

이제 우석 김기창 선생이 정착했던 공주 정안의 장원리 산천은 지금도 유구하여 구억말 도랑의 물은 여전히 동네를 정겹게 돌며 옛 모습을 간직한 채 호랑나비, 노랑나비가 봄바람에 춤추고 있다. 우석 선생이 생활했던 기와집은 소실되어 밭으로 텅 비어있고, 선생의 자취와 나비그림도 세월과 함께 묻혀 버려 모두가 안타깝다.

 

● 우석 김기창 연보 ●

1892년 서울 종로구 효자동 78번지에서 출생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전>에 “투접(鬪蝶)” 출품하여 입상

1927년 아들 김대호 출생

1950년경 공주시 정안면 장원리 329-3번지 구억말에 이주하여 정착

1954년 둘째 손녀 김효성 출생 (첫째 손녀는 1951년에 출생)

1956년 “石壽松年” 작품을 경산 최병기에게 회갑기념 선물함

1957년 청석 이재창을 제자로 사사하기 시작

1968년 손녀 김효성 소장의 “나비그림(胡蝶圖)”을 그림

1976년 84세로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