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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운림산방(雲林山房) * 전남기념물 제51호 *
운림산방(雲林山房)은 조선 후기의 화가인 소치(小癡) 허유(許維:1807∼1892)가 만년에 기거하던 화실의 당호다. 1981년 10월 20일 전라남도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으며 운림각이라고도 한다.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허유의 몽연록(夢宴錄)에 따르면 이곳에 다양한 화훼와 임목이 있었다고 전하나 오랫동안 황폐해 있었다. 1982년 손자 남농(南農) 허건(許楗)이 복원하였고 1992년과 1993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철산 주위에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진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룬 모습을 보고 이름지었다 한다. 경사지에 세워졌으며, 맨 위쪽에 허유의 화상을 모신 운림사(雲林祠)가, 오른쪽 뒷편에 사천사(斜川祠)가 있다. 돌담으로 둘러진 안쪽에 살림집이 있고 그 전면 우측에 허유가 머물던 사랑채가 있다. 살림집 앞에 1978년에 재건한 운림산방이 있다. 그 앞에는 가로 33m, 세로 27m 크기의 연못이 있고, 연못 중앙에는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에는 허유가 심었다는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으나 이제는 고사했는지 싹이 나지 않았다.
운림산방 입구전경
운림산방의 주인이었던 소치 허련(小癡 許鍊)은 서화예술이 발달한 진도에서도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로 불리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나중에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의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서 허유(許維)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므로 허유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허련은 순조 9년(1809)에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는데 28세 되던해부터 해난 대흥사 일지암에서 기거하던 초의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녹우당에 보관되어 오던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빌려다 보며 그림 공부를 했다고 한다.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분이다. 그래서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소치 허련(1809∼1892), 그리고 평생의 친구되는 추사 김정희(1786∼1856)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는데, 다산은 <동다기(東茶記)>를 쓰고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으며 우리 토산차를 예찬하였다. 초의선사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茶) 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운림산방과 연못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 1668~1715)는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이다. 시, 서, 화에 두루 능했고, 유학과 경제, 지리, 의학, 음악 등에도 뛰어났었다 한다. 산수화를 비롯한 일반 회화작품은 대체로 조선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한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보인다. 그러나 인물화와 말 그림은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하였으며, 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현재 그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자화상 <윤두서상(국보 240)>을 들 수 있다.
연못 너머로 보이는 소치기념관과 진도 역사관
허련은 30대 초반에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가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서화 수업을 하여 남화의 대가로 성장했다. 그는 조선 말기 선비화가 가운데 조희룡, 전기 등과 함께 김정희파로 불린다.
추사는 허련과 그의 그림을 대단히 사랑해서 원나라 4대화가의 한사람인 황공망을 대치라고 하는데 빗대어서 소치라는 호도 지어 주었고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까지 칭찬하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지내면서 이름이 알려진 허련은 38세때 헌종왕에게 그림을 바친 이래 여러차례 궁중을 출입하면서 왕 앞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왕실에 소장된 고서화를 평하기도 했다. 또 헌종의 배려로 고부감사를 지냈고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흥선 대원군 이하응, 권돈인, 민영익, 다산의 아들인 정학연, 신관호 등과 사귀며 시와 글과 그림을 나누었다.
소치 기적비
추사 김정희가 죽자 소치는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의 나이 49세 되던 철종 8년(1857)이었다. 그는 첨찰산 밑 이곳에 운림산방을 마련하고 그림에 몰두하며 만년을 보내다가 고종 29년(1892)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소치는 여러 그림 중에서도 특히 산수화가 뛰어났는데 선면산수도(서울대 박물관)가 대표작으로 꼽히며 몽연록(夢宴錄) 등 소치실록을 써서 남겼다. 운림산방은 허련의 세째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 . 1862~1938),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建 . 1908~1988)이 태어나 남종화의 대를 이은 곳이며 같은 집안 사람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 1896~1977 )이 그림을 익힌 곳으로서 한국 남화의 성지로 불린다.
운림산방의 모습
운림산방은 ㄷ자형 한식 기와로 정면 우측 3칸은 화실이며 나머지는 방으로 꾸몄다. 구조는 장대석으로 외벌대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굴도리집이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좌로부터 각 1칸씩 방, 부엌, 안방, 웃방, 광의 순으로 배치하였다. 중앙의 안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후손들이 진도를 떠나면서 방치되었던 이곳도 1982년 남농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화실 안에는 허씨 집안 3대의 그림이 복제되어 전시되어 있고 옆에 새로 지어진 유물관에도 허련의 소장품들이 전시 되어 있다.
<운림산방> 동영상 보기 - 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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