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계산방/백인현미술관

(화집) 송계산방 백인현/(화집) 송계산방 - 작품40년

<백인현 - 고집과 고독으로 밀고 간 오방색> : 송계산방 백인현 40년 회고전 - 나태주

송계, 송계산방, 송계산방주인 2015. 1. 5. 22:00

 

 

 

백인현 - <고집과 고독으로 밀고 간 오방색>

 

  나태주_시인, 공주문화원 원장

 

  지난 번 우리문화원 초대전으로 송계 백인현 교수의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는 그동안 화가의 전시회와는 다른 전시회였다. 갑년(甲年)을 2년 앞둔 작가의 회고전이기도 하고 자신의 작업의 편린들을 한데 모아 종합적으로 보여준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전시회에서는 화가 백인현의 미술생애가 변천해온 그 파노라마, 프로세스를 만날 수 있었다.

  한편에 그의 초기 작품인 수묵화가 있고 그 옆으로 격자창을 활용한 오방색 산수화가 있으며 또, 도자기 판을 활용한 오방색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그동안 그가 교육자로서 공을 들여온 한지민예품도 있고 전시장의 중앙부분에는 도자기 소품들까지 가득 전시한 매머드 급의 전시회였다.

 

  백인현 교수의 호는 송계(松溪). 1956년 공주 출생으로 공주사범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서산 부석중 고등학교에서 3개월간 교사를 거쳐 모교의 조교로 와서 6년간 근무하면서 석사 학위과정을 마치고 공주교육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화가이면서 교육자이다.

  어떻게 보면 행운의 사람이겠다. 중학교 학생 시절 미술교사인 윤완호 선생으로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평가와 격려를 받아 한국화가의 길에 들어서기로 작정했다고 하니 일찍부터 인생의 진로가 결정된 셈이다. 교수로서의 부임도 기회가 좋았다. 1986년 공주교육대학에서 한국화 전공교수였던 박주영 교수가 교원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 자리를 바로 이어받은 것이다.

 

  대개 빛나는 예인적 자질을 갖춘 작가들이 대학과 같이 생활과 신분이 보장되는 자리에 가면 그 자리에 안주하게 되어 작가로서 더 이상 발전을 못하고 마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그런 분들한테 헝그리와 앵그리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이런 점에서 신은 참으로 공평한 편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다.

  그러나 백인현 교수의 경우는 많이 다르다. 그는 갑년을 앞에 두고서도 아직도 목이 말라 있고 할 말이 무궁무진하고 더 나아가고 싶은 길이 아득히 멀리 있어 보이는 사람이다. 문화원의 전시회장에서 만난 우리는 싸우는 사람들처럼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것도 인터뷰 도중 밀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중간부분에서 멈췄다가 다시 이어서 하는 방식으로 했다. 이런 약간은 격한 인터뷰를 통해 그의 내면의 세계가 보다 솔직히 드러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의 주제는 『논어』의 <옹야>편에 나오는 ‘지자(知者)는 요수(樂水)요 인자(仁者)는 요산(樂山)이라 지자(知者)는 동(動)하고 인자(仁者)는 정(靜)하니 지자(知者)는 락(樂)하고 인자(仁者)는 수(壽)한다’는 문장을 요약한 ‘요산요수(樂山樂水)’다. 화가 자신은 지자일까, 인자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인터뷰에 들어갔다.

  화가와 대담자는 커다란 파라솔 모양의 일산(日傘) 밑에 마주 앉았다. 실은 이것도 전시품 가운데 하나다. 그 옆으로 그림부채와 지등(紙燈)이 여럿 전시되어 있어 여느 작가의 전시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창출한다. 이른바 한지민예품이다.

  “아, 저거요. 제가 교육대학교에서 초등학교 교사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우리 전통 한국화를 어떻게 학생들에게 가르칠까를 생각하다가 창안해낸 일종의 교수학습 방법 차원에서의 작업들입니다. 민예품이란 민중이 생활하면서 필요에 따라 주변의 친환경적 재료를 동원해서 만들어 썼던 하나의 생활용품입니다. 옛 조상들은 이런 물건들을 핸드메이드로 만들어 썼지요.”

 

  송계(백인현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한지민예품에 관한 작업은 작가적 의미에서는 큰 의미는 없지만 학교에서 전통 미술교육을 하는 수단적인 역할로서는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 자신의 가풍이 고전적이고 유교적인 면이 있어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었는데 이러한 성향이 자연스럽게 선조들이 생활 속에서 활용했던 민예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 이런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선 송계는 자신의 직업인 교육대학교의 교수님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하고 있다고 보겠다. 이런 점에서 대담자는 약간은 삐딱한 쪽에서 질문을 계속해나갔는지 모른다. 왜 순수한 작업이 아니고 한지민예품 작업인가가 조금은 의아스러웠던 것이다.

  “한국화 수업을 하는데 있어 한지로 된 오브제를 통해서 우리 전통 미술교육에 접목시키는 교수학습방법의 확장이기 때문에 작가들이 볼 때에는 엉뚱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교육대학교 교수의 사명감으로 이런 작업을 합니다. 만약 이런 작업을 서울 인사동쯤에서 했다면 오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전통 한국 미술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아줄 것입니다.”

 

  항변조로 말하는 송계의 어조는 굽힘이 없고 거침이 없다. 거기서 대담자는 화가의 고집과 신념 같은 것을 느끼고 고독 같은 것을 엿보기도 한다. 그래도 대담자는 다시 한 번 대학교 교수님들은 생활이 보장되어 있어 등 뜨시고 배부른 환경에 나태해지거나 직장의 일에 함몰되지 않느냐고 따지듯 묻는다.

  “그럴까요?…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겐 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젊어서부터 고향이란 점에 방점을 찍어놓고 고향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교육자로서 이 지역의 문화와 학생교육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저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다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의 미술인으로서의 삶 35년이라고 봅니다.”

  그러하다. 그러한 점에서 송계는 매우 바지런한 작가이고 열성적인 이력을 남기고 있는 사람이다. 그동안 개인전만도 14회나 했고 그룹전은 매년 15회 정도로 총 400회를 넘기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교직이 주는 느슨함과 편안함, 보장된 생활패턴에서 안주하는 자신을 일으켜 세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송계의 그림을 말함에 있어서는 오방색 그림을 말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오방색. 동향철학의 근간으로서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다섯 가지 색깔을 말한다. 청, 적, 백, 흑, 그리고 황. 제각기 동서남북 중앙의 방위를 가리키고, 춘하추동과 간절기를 상징하며 유교의 사단(四端)에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가리키며 부처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또한 포함하는 것이 오방색이다.

  동양에서는 예부터 이 오방색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단청을 입혀 왔는데 오늘날에도 사찰이나 고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색감이다. 이런 오방색을 활용하여 여러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을 텐데 미술 분야에 문외한인 대담자가 알기로는 오승윤 화백이 그 대표자격인 것 같은데 우리 주변에서도 송계가 오래 전부터 그 오방색 그림을 그려왔던 것이다.

 

  송계의 오방색 그림은 여기서도 많이 다르다. 격자창을 이용한 오방색 그림. 도자기 판에 그린 오방색 그림. 그것은 이제 송계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했다. 대번에 보면 안다. 아, 저 그림! 분명히 감이 오게 되어 있다. 다른 화가들도 이 점에 대해서는 인색하지 않게 평가하고 인정을 해주고 있다.

  “오방색 그림의 재료는 석채(石彩)입니다. 물감 자체가 돌가루이기 때문에 발색이 잘되고 자외선에 의해 탈색이 안 되는 영구불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희귀한 물감이지요. 거기다가 제가 즐겨 사용하는 녹색과 적색은 완전 보색이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강하게 어필해옵니다.”

 

  송계의 오방색 그림은 매우 말쑥해 보인다. 산과 들과 계곡, 그리고 그 위에 떠있는 해와 달이 전부다. 나무나 풀이나 인물도 없다. 마음을 가지고 그림을 보는 사람이라면 그런 형상들이 공주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대번에 짐작하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공주와 분명 관계가 있습니다. 얼른 말하면 계룡산과 금강입니다. 이들 강과 산은 백제 때부터 있어온 자연일 수 있고 오늘날의 자연일 수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공주의 자연을 표현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초기에는 다른 화가들처럼 객관적으로 자연을 관찰에 의해 정확하게 그리려고 애썼습니다. 먹과 제한된 색채를 동원해서 그리는 그림이었지요. 그러나 지나오면서 저는 자연을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방색 그림입니다. 저는 공주의 자연이 우리나라 자연의 중심이라고 봅니다. 계룡산과 금강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이 금수강산이고, 저에게 이 천혜의 자연에 대한 모티브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지금 세종보가 있는 언덕이 제가 어려서 소를 몰고 풀을 뜯기던 자리입니다.”

 

  화가의 고향예찬, 자연예찬은 매우 찬란하다. 어쩌면 화가의 유년기의 체험과 추억과 그 행복감들이 그림으로 환치되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한동안 화가와 대담자는 티격태격 말다툼하는 사람들처럼 이야기를 나누었고 끝부분에 가서 상당한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제 화가는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일까? 그림을 그리며 살아온 일생은 행복하고 후회 없는 것이었을까?

  “네, 저는 화가로서 살아온 일생이 매우 보람 있고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후회도 없습니다. 물론 곁에서 보는 가족들이야 힘든 면도 있었겠지요.”

  앞으로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 화가는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작업을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대답한다. 전통을 새롭게 바라보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그림은 동양적 산수의 범주에 있을 것이다. 왜 화면에 사람을 그려 넣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자신도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커다란 범주 안에서는 인간이 자연이고 자연이 또 인간이 아니겠느냐. 그것이 그의 답변이다. 그러면서 인간과 자연은 순환적이란 말을 또한 빼놓지 않는다.

 

  대담을 마치면서 느끼는 것은 화가가 겉으로 보기보다는 내면적으로 단단한 구석이 있고 조금은 고집스럽기까지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면서 고독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그의 오방색 그림에서 자주 보이던 백색의 공간들이 떠오른다. 그는 격자창 그림에서 격자창까지도 그림으로 보아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려지지 않은 부분이 훨씬 더 큰 메시지를 담고 있을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언외지언(言外之言). 말 밖의 말. 이제는 그의 그림에서 그려지지 않은 부분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백인현 (고집과 고독으로 밀고 간 오방색) - 나태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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